1963년 대만 타이난의 한 평범한 가정에서 한 소년이 태어났다. 그의 이름은 젠슨 황(Jensen Huang). 아버지는 에어컨 제조업체 캐리어에서 일하는 엔지니어였고, 어머니는 영어 교사였다. 특별할 것 없는 중산층 가정의 아이였지만, 어머니의 교육열은 대단했다. 어린 젠슨은 자연스레 책을 가까이하며 자랐고, 부모의 영향으로 성실하고 학구적인 성격을 갖게 된다.

(이미지=라임저널) 9살 청소부에서 세계 1위 CEO로 — 젠슨 황의 인생과 엔비디아 신화
소년의 가족은 아버지의 발령으로 태국으로 이주한다. 그러나 1973년 태국에서 민주화 운동이 격화되자, 가족은 불안한 정세를 피해 미국행을 결심한다. 이미 켄터키에 정착해 있던 친척 덕분에 젠슨과 형은 미국으로 건너가게 되었고, 그때 그의 나이는 겨우 아홉 살이었다.
하지만 아메리칸 드림의 시작은 고통스러웠다. 그가 배정된 기숙학교는 일반 학교가 아니라 문제아와 비행 청소년들을 수용하는 시설이었다. 어린 아시아계 이민자 소년은 인종차별과 폭력 속에서 하루하루를 견뎌야 했다. 그러나 젠슨은 꺾이지 않았다. 그는 아무도 맡지 않으려던 화장실 청소를 자원했고, 싸움꾼 룸메이트들의 숙제를 도와주며 점차 신뢰를 얻었다. “그 학교는 내게 인내를 가르쳐준 곳이었다”는 그의 회상처럼, 그는 훗날 그 학교에 200만 달러를 기부한다.
오리건으로 이주한 후 그는 본격적으로 자신의 재능을 드러냈다. 수학과 과학에 탁월한 실력을 보였고, 16세에 고등학교를 조기 졸업했다. 오리건 주립대에서 전기공학을 전공하고 스탠퍼드 대학원에서 석사 과정을 마친 뒤, 그는 AMD(Advanced Micro Devices)에 입사해 마이크로프로세서 설계를 담당했다. 1년 뒤 LSI 로직으로 이직한 그는 선 마이크로시스템즈(Sun Microsystems)를 담당하게 되면서 인생의 전환점을 맞는다. 이곳에서 훗날 함께 엔비디아를 창업할 두 동료, 크리스 말라코프스키와 커티스 프리엠을 만난 것이다.
1990년대 초, 영화 ‘터미네이터 2’와 ‘쥬라기 공원’이 개봉하며 3D 그래픽 기술이 주목받던 시기였다. 개인용 컴퓨터 보급이 늘며 게임 산업도 성장하고 있었다. 비디오게임을 좋아하던 젠슨은 “미래의 컴퓨터에는 고성능 3D 그래픽이 반드시 필요하다”고 확신했다. 그는 뜻이 맞는 두 동료와 함께 1993년 4월 5일, 은행 대출 4만 달러를 기반으로 회사를 세운다. 회사 이름은 라틴어로 ‘부러움’을 뜻하는 ‘엔비디아(NVIDIA)’였다.
창업 초기 그는 전설적인 벤처투자자 돈 발렌타인을 만나 프레젠테이션을 했다. 긴장한 나머지 발표를 망쳤지만, 발렌타인은 그의 열정과 기술 비전을 보고 200만 달러를 투자했다. “이 돈을 잃으면 가만두지 않겠다”는 농담 같은 경고와 함께였다.
첫 제품 NV1은 가격이 비싸고 성능이 평범해 실패했다. 게다가 마이크로소프트가 3D 그래픽의 표준을 ‘삼각형 구조’로 정하면서, 엔비디아가 사용하던 ‘사각형 구조’ 기술은 한순간에 구시대 기술이 되어버렸다. 세가(SEGA)와의 계약을 이행할 수 없게 되자 회사는 파산 위기에 몰렸다. 이때 젠슨은 세가 회장 이리마지리 쇼이치로를 직접 찾아가 이렇게 말했다.
“지금 기술로는 개발을 마칠 수 없습니다. 그러나 투자금은 그대로 주실 수 있겠습니까? 그 돈이 없으면 회사는 망합니다.”
그의 진심 어린 눈빛을 본 회장은 500만 달러를 지원했다. 그 돈으로 엔비디아는 다시 숨을 돌릴 수 있었고, 젠슨은 그 은혜를 평생 기억했다.
그는 전 직원의 절반을 정리하며 비상경영 체제를 가동했다. 그리고 마이크로소프트의 표준에 맞춰 삼각형 기반의 새로운 그래픽 칩 ‘리바128(RIVA 128)’을 개발했다. 이 제품은 출시 4개월 만에 100만 대가 팔리며 회사는 기사회생했다. 이어 ‘리바 TNT’와 ‘지포스256’을 연달아 성공시키며, 엔비디아는 세계 최초의 GPU(Graphics Processing Unit) 제조사로 자리 잡았다.
그러나 위기는 다시 찾아왔다. 2000년대 중반 노트북용 GPU 결함 사태와 2008년 금융위기로 회사는 큰 타격을 입었다. 그는 임원 연봉을 삭감하고 자신은 1달러만 받겠다고 선언했다. 동시에 그는 ‘병렬 컴퓨팅’의 가능성에 모든 것을 걸었다. 수십 개의 그래픽카드를 동시에 연결하는 기술을 연구하던 중, 젠슨은 쿠다(CUDA)라는 개발자용 소프트웨어를 완성했다. 당시에는 상업적 가치가 미미했지만, 훗날 인공지능 시대의 핵심 기술로 자리 잡는다.
2012년 토론토에서 열린 이미지 인식 대회에서 엔비디아 GPU를 사용한 연구팀이 우승하면서 세상은 GPU의 잠재력을 다시 보기 시작했다. 이후 구글, 페이스북, 마이크로소프트 같은 거대 기업들이 엔비디아의 GPU를 인공지능 학습용으로 도입했고, 엔비디아는 AI 혁명의 중심으로 떠올랐다.
2022년 말, 챗GPT(ChatGPT)의 등장은 엔비디아를 새로운 차원으로 끌어올렸다. 오픈AI가 챗GPT를 훈련시키는 데 사용한 GPU가 바로 엔비디아의 V100이었다. 전 세계적으로 인공지능 붐이 일면서 엔비디아의 GPU는 필수 인프라로 자리 잡았고, 2024년 6월에는 시가총액 3조 3천억 달러로 마이크로소프트를 제치고 세계 1위 기업이 되었다.
젠슨 황은 지금도 매일 일한다. 휴가도, 주말도 없다. 그는 보고서 대신 모든 직원에게 이메일 보고를 의무화했고, 매주 일요일 밤 수천 통의 메일을 직접 읽고 피드백을 준다. 이 때문에 엔비디아는 조직 내 정치가 거의 없는 회사로 알려져 있다. 그는 “5시에 퇴근할 생각이라면 당장 나가라”고 말하면서도, 반려동물을 회사로 데려와도 된다고 허락할 만큼 인간적인 면모를 보인다.
그의 인생 철학은 간단하다. “비디오게임처럼 실패는 반복될 수밖에 없다. 중요한 건 얼마나 빨리 다시 일어서는가다.”
그 말처럼 그는 늘 위기 속에서도 방향을 잃지 않았다.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았고, 은혜를 잊지 않았으며, 사람과 기술을 중심에 두었다.
오늘날 엔비디아는 인공지능, 자율주행, 메타버스, 양자컴퓨팅 등 미래 산업의 모든 핵심을 쥐고 있다. 그리고 그 중심에는 여전히 검은 가죽 재킷을 걸친 한 남자가 서 있다. 아홉 살에 화장실을 청소하던 소년은 이제 세계 경제의 판도를 바꾸는 CEO가 되었다. 젠슨 황의 이야기는 더 이상 ‘성공담’이 아니라, 실패를 견디고 다시 일어서는 인간 의지의 기록이다.